2025. 8. 9. 22:37ㆍ돌아가는 길
또 예전 기록이다.
일기 제목은 '도보여행'이라고 쓰여 있지만 지나고 생각해 보면 너와 나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한 분기점으로 삼은 여행이었으니 이게 그 말 많은(?) '이별여행'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가고 싶던 도보여행을 다녀왔다.
아직, 서울은 봄기운이 채 올라오지 않은 때였지만 확실히 남쪽은 좀더 따뜻하더라.
여행을 갈 때마다 새로운 인연 같은 것들을 기대하게 되지만 내 여행은 언제나 딱 그 정도였다.
깨끗하게 고민거리가 사라질 리도 없고, 운명 같은 인연을 만나서 돌아오지도 않는다.
여행지에서의 영화 같은 로맨스도 없었다.
어째 나는 여행에서조차 기대치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도 없고 특별한 이벤트 같은 것도 없는 걸까.
지루한 인생을 닮아가는 것만 같다.
물론 이번 여행은 동행이 있었으니 당연하긴 하지만.
첫째 날. 기차를 타고 임실로.
그애는 말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기차에서 접선하자."

나는 영등포에서, 그 애는 수원에서 기차를 탄다.
당연히 올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큰 스릴은 없지만, 그래도 일상과 분리된 공간/시간에서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 기차값 34,700원 (여기 나오는 비용은 다 2인 기준이다)
- 콜라, 사이다, 구운양파 2,700원
목적지까지는 멀다. 그애는 기차에서 돌아다니던 음식 수레(?)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무척 실망했다. 대신 식당칸이 생겼더라. 노래방도 있고 컴퓨터, 오락기도 있다. 하지만 굳이 사용하지 않는다. 남는 시간엔 잠을 자거나 간식을 먹는다. 특별한 대화를 하지는 않는다. 대화는 하지만, 특별한 내용은 없다. 잠깐, 마음속에서 이번 여행이 질기게 끊지 못하고 있는 이 인연을 끊어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비슷한 다짐들을 수없이 반복했기 때문에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역시 자신이 없었던 거겠지.
드디어 임실 도착.
일단 버스 터미널로 간다. 내일 아침 이동하려면 차 시간을 알아봐야하기 때문에.
- 택시 3,000원
터미널에 도착해서 딱 느낀 것은 - 와, 정말 시골이구나....
작은 마을이다. 동네에 숙소도 한 곳. 조금 늦게 도착했더니 전체적으로 깜깜하고, 밥을 먹을 곳도 없다. 그나마 24시간 편의점을 발견, 숙소나 식당을 물어보려 편의점에 들렀다. 음료수랑 간단한 간식을 사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지만, 우리가 눈으로 확인한 것과 크게 다른 정보는 없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서 라면 등으로 늦은 저녁을 대신한다.
- 음료 등 4,400원
- 라면 등 9,750원
숙소는, 운동하는 친구들이 오는 바람에 방이 딱 하나 남았는데, 5~6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방이다.
보일러도 틀어두지 않아서 방은 차갑지만, 잘 곳이 없다. 어쩔 수 없지.
- 방값 40,000원
하지만 따뜻한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전화해서 물 사용한다고 말을 해야 온수 버튼을 눌러주는 것 같다. 방도 여전히 쌀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첫째 날은, 1박 2일 재방송을 보다가 잠자리로. 도보여행이라 짐을 최대한 줄여야 하기에 속옷이나 양말도 빨아서 다시 입고 신을 생각을 하고 가져왔다. 첫째 날 양말 빨기 묵지빠는 나의 승리. 하하하.
첫째 날 쓴 금액 94,550원
둘째 날.
대략 8시가 조금 넘어서 일어난 것 같다. 이번 여행은 둘 다 그리 부지런한 편은 아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몸이 많이 피곤할 것을 생각하면 체력 안배를 잘해야 한다.
...라고 말은 하지만 결국은 둘 다 아침에 일찍 못 일어나는 것, 그뿐이다.
아침에 문을 연 식당도 많지 않다. 하긴, 식당 자체가 많지 않다. 설렁탕을 시켜 먹고, 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걸어갔다.
- 설렁탕 12,000원
우리가 걷기를 시작하려는 곳은 덕치면 일중리.
사실 난 잘 모른다. 일정과 코스는 그 애가 만들었기 때문에. 어디엔가 책에서 좋은 코스 그런 게 나왔나 보다.
- 버스 4,400원
드디어 걷기 시작이다.
그애가 짠 걷기 코스는 중-강-약. 오늘은 '중'에 속하는 날이다. 처음이니 스트레칭도 꼼꼼하게. 약 2~30분 스트레칭을 하는데, 사실 난 좀 지겨워서 빨리 걷자고 보챘다. (하지만 스트레칭은 중요)

흙길, 아스팔트길, 숲길
여러 길을 걷는다.
처음 20분은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
벌써 가방은 조금씩 무거워지고, 햇빛 때문에 금방 땀이 난다.
예전에 읽었던 <밤의 피크닉>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물론 너무 환하디 환한 낮이었지만, 그 글을 읽을 때의 기분이, 아주 잠깐 떠올랐다.
봄이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앙상한 가지들에 초록이 가득하다고 생각하면, 너무 멋질 것 같다.
섬진강을 따라 쭈욱 걷는 코스라고 했다. 옆에는 계속 강을 끼고 걷는다.
특별히 표지판 같은 게 없기 때문에 지도를 보며 걷기도 힘들다. 가끔 갈림길이 나오면 주저하기도 하지만, 어차피 걷다 보면 어딘가도 연결될 거라 믿으며 걷는 것이어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 그렇게 생각한 순간, 길을 잘못 들어서 막다른 산길이 나와버렸다.
결국 징검다리를 건너 강 저편 마을로 넘어가야 하는데, 신발을 벗고 강물로 들어가야 해서 처음엔 좀 망설였다.

물은, 정말 차갑다.
조금만 오래 들어 있으면 발가락이 얼어버릴 것 같다. 하지만 물 가운데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강 옆에서 보는 풍경과 달랐다.
마을로 건너왔다.
내일 코스는 순천에서 시작한다. 저녁은 순천으로 가서 잠자리를 정하고, 아침 버스 시간을 알아봐야 한다.
순천까지 바로 가는 것이 없어서 일단 동계로 나간 다음, 오수로 버스를 타고, 오수에서 순천까지 기차를 타기로 한다.
문제는 이곳은 작고 작은 시골 마을, 택시가 돌아다니다 잡힐 리 없다.
전화해서 불러야 하는데, 버스 정류장도 보이지 않아 택시 번호도 따로 알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물어볼 수밖에. 그래도 좀 최근에 다시 지은 듯, 왠지 좀 그나마 젊은 사람이 있을 것 같은 집을 골라 문을 두드렸다.
범상치 않은 포스의 아저씨가 (아마도) 식사를 하다가 나오셨다.
이런저런 사정을 얘기하며 택시 번호를 알 수 있는지 물어보자, 자신이 걸어주겠다 하신다. 커피와 물을 주시며, 밖에서 담배를 피우신다. 2년 전쯤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이야기를 시작하시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들. 그 마을에는 - 성을 잊었는데 - 친척들만 산다고 한다. 집성촌이었던 듯. 동네 주민들이 다 서로 아저씨고 아주머니이고 조카이고 하다고. 그렇게 아저씨 이야기를 듣다가, 택시가 왔다.
사실 아저씨는 동계까지 이제 한 시간 정도만 더 걸으면 되는데, 이왕 걸어온 거 더 걷지 그러냐고 몹시 아쉬워하셨다. 그렇지만 내 동행인이 내 체력을 약간 걱정하였고, 우리 계획 자체가 아주 아주 빡센 도보여행은 아니었기에 그냥 택시를 타기로 했다. 그 애는 그 아저씨가 우리를 보며, 젊은이들이 근성이 부족해 조금 걷다가 택시를 타네 -라고 생각할까 봐 좀 찜찜해하는 것 같았다.
- 택시 4,000원
터미널에 도착해서 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4~50분 정도 여유가 있다. 4시가 넘었던가,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작은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시켰는데, 너무 공복시간이 길어서 그랬는지 밥을 조금 남겼다. 다 먹고 갈 때쯤, 주인 할머니께서
"밥을 왜 남겼어."
하며 아쉬움인지 나무람인지 모를 한 마디를 하셨다. 왠지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때는 더 먹을 수가 없었다.
- 늦은 점심 겸 10,000원
- 버스 3,000원 (오수로)
- 기차 9,800원 (오수에서 순천으로)
- 대일밴드 1,000원
발에 물집이 생겼다.
- 맥주, 귤 10,000원
과일을 엄청 좋아하는데, 여행에서 먹기엔 귤이 가장 편한 것 같다. 그다지 싱싱하진 않았지만.
- 숙박 30,000원
스카이 모텔이던가, 따뜻하다 못해 좀 더웠다.
- BBQ 16,000원
과일을 사면서 저쪽에 BBQ가 생겼다고 들었다. 치킨이 너무너무 먹고 싶어서 시켜 먹기로 했는데, 받아온 번호가 알고 보니 전국 주문 번호였다. 그것도 모르고
"여기 스카이 모텔인데요."
했다가, 그야말로 전국적인 망신을 당했다. (물론 상담원은 친절했습니다)
치킨과 맥주를 먹으니 그렇게 힘들었던 하루도 좀 정리가 되는 기분. 힘은 들지만, 못 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내일은 '강' 코스. 긴장해야 하려나.
빨래 묵지빠, 연승!! 야호!
둘째 날 쓴 금액 90,400원
다음날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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