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6. 17:31ㆍ그리움의 온도
시작은 한 편의 시였다.
최영미 시인의 시를 읽고 아 선운사에 가야겠다, 마음먹었다. 꼭 가을에 가고 싶었다. 물론 곧 잊었다. 친구들과 강릉을 다녀오고 생일 모임 약속을 잡고 2월 언제 여행을 갈까 계획하고. 가방에 시집을 넣어 다녔지만 꺼낼 일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다시 선운사가 떠올랐다. 검색을 해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리는구나. 연말이면 어딜 가든 사람이 차 있을 테고 홀로 그 틈에서 괜찮을까. 하지만 그럼 언제 가야 하지. 고민하는 사이 다른 생각들로 이내 뒷전이 된다. 내가 가고 싶은 건 가을의 선운사인데. 꼭 그 계절이었으면 좋겠는데. 깊이 사랑했던 것들도 영원하지 않다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깨닫는 날이었던 것 같다.
항상 머물러 있을 것 같던 것들도 변하고 오지 않을 것 같은 날들도 결국은 찾아온다. 어떤 괴로운 날들도 언젠가는 멈춘다는 거겠지. 그럼에도 어떤 것들은 끝난다는 경계가 너무 모호하여 그저 지속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 그때의 나는 끝을 원했던 것 같다. 이제까지 지속되던 무언가를 끊어내고 싶었으리라. 그걸 선운사에서 하고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왠지 거기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낙엽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차가운 공기를 맞고 먼 곳 어딘가를 바라보고 싶었다.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아직 선운사에 가보지도 못했는데, 이젠 그때 무엇을 떨치고 싶었는지 떠오르지도 않는다. 세월이 그렇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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