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계급, 사랑, 권력

2025. 6. 20. 16:26그리움의 온도


20대 후반에 만난 남자친구는 고졸이었다.

2년제 대학을 중퇴했다고 했다. 집안의 돈 문제는 아니었다. 자기 길이 아닌 것 같았다고. 가끔 대학을 졸업한 나와 고졸인 자신에 대해 비교해도 사실 별로 와닿지는 않았다. 어차피 둘 다 직장에서 고만고만한 돈을 벌고 있었으니까. 들어보니 아버지는 편의점을 물려받길 원하셨고 본인은 너무 답답할 것 같아 싫다고 했다. 둘 다 집안에 큰돈은 없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들이라 여겼다.

 

우리는 우연히 만났다.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졌다.

첫사랑은 아니었지만 서로 마치 이전에는 어떤 약속도 해보지 않은 듯 사랑을 약속하고 믿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성향이나 성격이 다른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집안 분위기도 꽤 달랐기에 어쩌면 오히려 서로 다른 점들에 끌렸을지도 모른다. 그가 언제부터 나를 '있는 집 자식'이라 불렀는지 모르겠다. 세상엔 여러 기준이 존재할 테고, 그의 기준에서 나는 그런 존재였다. 처음 하는 사랑처럼 빠져들었지만, 그만큼 빠르게 우리는 또 멀어지기 시작했다.

사랑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한다.

원치 않아도 어떤 식으로든 변화는 계속된다. 그는 변했다. 아니 변한 것은 그가 아니었다. 그가 나를 있는 집 자식이라 부르며 절반의 진심이 섞인 농담을 반복하고, 마냥 순하리라 생각했다가 이전까지 자기 주변의 여자들이 취하던 태도와는 다르게 자신을 대하는 데 적응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농담으로도 백치미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애쓰며 지기 싫어하는 연인에게 불편해하며 내게 변할 것을 요구할 때, 나 역시 처음엔 그에게 변할 것을 요구했다. 아니, 그냥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자고 했다. 그는 좀 더 다정하고 좀 더 서로를 하나처럼 여기고 좀 더, 좀 더 서로를 위해 때로는 희생하고 자기 것을 버리기도 하자고 했다. 내가 뭐라고 했더라. 일단 그냥 인정하자. 이제까지 살아오며 만들어진 세계가 꽤나 다르다는 걸 받아들이고 천천히 서로를 맞춰가면 안 되겠냐고 했다. 너도 나도 당장 변하기는 무리라고.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상처였다. 내 말과 행동 모두.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냉정한 연인. 너무 이기적인 연인이었다. 인정한다. 상대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데 서툴렀고 변명 같지만 세상을 충분히 겪지 못했다. 문제는 그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 누나만 셋이었던 막내와 언니만 둘이었던 막내는 상대를 배려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우린 서로를 포기하는 걸 택했다. 마치 사랑에 모든 걸 걸고 그 사랑 하나를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우리는, 변했다.

사랑의 권력은 어디 있을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흔히들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라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때로 권력은 일부러 버려지기도 하고 전혀 다른 요소들로 인해 그 자리를 옮겨가기도 한다. 계급이라는 것은 연애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피해 갈 수 없다. 그 계급을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고 그 실체조차 모호할지라도 일단 인식하기 시작하면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그 시절의 나는 늘 눈치가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몸이 좋지 않아 택시를 타려는 순간에도 주문한 식사를 배가 불러 남기게 될 때에도. 주저하게 되고 망설였다.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빌미를 주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가진 것이 많아 배부른 자라는 소리를 연인에게 계속 듣는 것은 괴롭다. 말싸움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끝까지 상대의 의견이 있는 만큼 내 의견도 있다고 말하는 것보단 그의 말에 고개 끄덕이는 것이 피로를 줄였다. 가슴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그도 느꼈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인지 모르겠지만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성격 탓으로만 돌리기엔, 비겁해 보였다. 사랑이 끝나는 순간,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우린 그냥 서로 사랑했는데 왜 헤어지게 되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대상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를 많이 사랑했다.

여러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했다. 서로 함께하기 위해 감수한 것들도 아깝지 않았고, 그 이전의 나로선 생각할 수 없을만큼 그를 위해 마음을 다했다. 그 사람도 그랬을 거라 믿는다. 한때 우리가 최선을 다했다는 건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서로 어긋나 있었을지언정, 계속해서 함께이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랑은 어려웠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중심이다. 세계의 중심을 바꾸는 건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만큼 힘든 일인 거 아닐까.

 

언젠가 나이들어 이런 길을 손 잡고 걷고 싶다



우울한 얘기를 쓰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잘못했다거나 우리의 연애를 깎아내리고 싶은 것도 아니다. 어렸다는 핑계로 이기적이었던 내 모습을 포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계급이니, 권력이니 하는 것들도 실은 잘 모르겠다. 실수들, 잘하지 못한 것들, 다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떠올리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그와 난 다시 만나도 결국 다시 같은 문제로 헤어질 것이다. 헤어진 게 잘 된 일이다. 그렇게 믿는다. 어느 순간부터 함께 하면 심장이 아팠다. 하루하루가 조금씩 부서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다. 서로가 이 연애의 권력에서 밀려난 약자라 믿은 체.